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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후기 인상파 선구자, 폴 고갱

by 이프로윤 2023. 7. 18.

고갱의 어린시절

 

폴 고갱은 1848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저널리스트 였던 아버지, 페루계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어린시절은 일련의 비극으로 시작되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가 불과 3살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과 재혼하면서 폴을 페루 리마로 보내 친척들과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페루에서의 그가 느꼈던 남미의 풍부한 문화와 선명한 색채는 후에 그의 예술적 방향성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855년 고갱은 기숙학교에 다니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와 정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문학과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교육을 마친 뒤 상선에 입대하여 남미와 카브리해, 태평양 제도 등 여러 이국적인 장소를 찾아 세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초기 예술활동

 

1873년 그는 덴마크 출신의 여성인 메테 소피 가도와 만나 결혼했고 파리에 정착하여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리의 활기찬 문화적 장면에서 많은 아티스트, 작가, 뮤지션과 친구가 되었고, 카밀 피사로, 에드가 드가, 피에르 아구스트 르누아르 등 인상파 작품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만남들로 인해 고갱의 초기 작품들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면들을 보여줍니다. 그는 인상파 운동의 특징인 밝은 색과 빛의 효과를 살려 일상 풍경과 장면을 그려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클로비스가 사망한 것을 비롯한 경제적 어려움과 개인적인 문제들이 겹치면서 고갱은 정신적, 감정적으로 타격을 받게됩니다.

 

 

 

 

원시주의

 

1879년대 후반 고갱은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인생에 있어 큰 전기를 맞이합니다. 그는 주식 중개인 일을 그만두고 예술에 뛰어들었는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술가로서의 인지도와 금전적인 성공을 크게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좌절은 유럽 문화의 표면성과 맞물려 그를 보다 원시적이고 손대지 않은 환경에서 예술적 영감을 찾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86년 고갱은 프랑스 브르티뉴에 있는 그림같은 마을인 퐁 아벤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거기서 그는 아카데믹 예술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가 그룹 폰 아벤의 학교를 접하게 되었고 시골의 전통적인 브레튼 문화에 영감을 받아 그의 예술은 인상주의에서 보다 상징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갱과 고흐

 

고갱과 고흐는 1887년 고갱이 파리의 빈센트르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습니다. 반 고흐보다 여덟 살이 많았던 고갱과 고흐는 서로 다른 예술적 차이를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의 예술에 대한 존경과 당시의 관습적인 예술을 넘어 창의적인 표현과 탐구에 대한 열망을 공유 하면서 유대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이 둘은 아를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예술적 협력을 해나갔으며 특히 고흐는 고갱의 경험과 전문성을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둘의 예술적 협력에 대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1888)가 있습니다.

 

하지만 고갱과 고흐의 서로 다른 그림에 대한 견해, 서로 다른 성격과 삶의 경험이 둘의 갈등을 야기했고 고흐의 귀 절단 사건으로 고갱은 급히 아를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록 고갱은 아를을 떠나긴 했지만 고흐와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상호 존중과 동지애를 표현했습니다.

 

 

타히티와 원시를 찾아서

 

고갱은 보다 원시적이고 진정한 삶에 대한 탐구를 했고 결국 1891년에 그는 타히티로 가게됩니다. 유럽 사회의 압박과 현대 문명의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갱은 보다 단순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낙원을 찾고자 했는데 타히티가 아마도 그가 찾고자 했던 낙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타히티에 도착한 고갱은 처음에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이 이미 섬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때 묻지 않은 낙원에 대한 자신만의 버전을 찾기로 결심하고 섬의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이어나갔습니다.

 

타히티에 머무는 동안 고갱은 가장 상징적이고 논란이 많은 작품을 그려나갔습니다. 그는 유럽의 예술적 기법과 지역의 상징주의 및 영성의 요소를 혼합한 그림을 탈피하고 대담한 색상, 납작한 형태, 왜곡된 비율 등 이러한 특징적인 스타일로 무성한 풍경, 활기찬 식물, 감각적인 타히티 여성을 묘사해 나갔습니다.

 

 

 

 

 

고갱의 마지막과 영향

 

타히티에서의 그의 예술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난, 외로움, 질병에 시달려 주변 환경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습니다. 1893년에 그는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곧 남해로 돌아가 이번에는 더 정통적이고 손길이 닿지 않은 환경을 제공한다고 믿었던 마르케사스 제도에 정착했습니다.

 

고갱은 계속해서 획기적인 작품을 창작했지만 그의 건강은 계속해서 쇠퇴했습니다. 1901년에 그는 매독에 걸렸고 그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폴 고갱은 19035854세의 나이로 마르케사스 제도의 히바오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갱의 예술적 가치는 그가 죽고나서도 완전히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획기적인 색상 사용, 혁신적인 기법, 전통적인 표현에 대한 거부는 다음 세대의 예술가, 특히 학문적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표현을 탐구하려는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상징주의와 야수파는 고갱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운동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앙리 마티스는 색상과 형태에 대한 고갱의 접근 방식에 감탄했으며 고갱의 영향은 마티스 자신의 생생한 색상과 표현 기법의 사용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선구적인 예술가로서의 고갱의 명성은 계속 커졌습니다. 그의 작품은 높은 인기를 얻었으며 현재 전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과 개인 소장품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의 그림의 매력은 관객을 머나먼 땅으로 데려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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